저는 지난 7월 중순부터 8월초까지 폴란드에서 열린 “마지스”와 “세계청년대회”에 다녀왔습니다. 마지스(Magis)는 예수회청년양성 프로그램입니다. 이번 대회에 저희 한국에서는 서강대생을 포함하여 41명이 참가하였고, 세계 예수회를 통해 50개 나라에서 2000여명이 참가하였습니다.
마지스는 11일동안 열리는데, 처음 2박3일은 춤추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다음 6박7일은 다양한 체험을 하고, 2박3일은 성찰과 축제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일주일간 세계청년대회(200백만명)에 들어갑니다. 마지스의 하이라이트는 체험에 있습니다. 크게 “영성”, “순례”, “문화”, “예술”, “사회봉사” 5가지 체험으로 나누고, 다시 세부적으로 다양한 체험을 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번 대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체험이 풍요로웠는데, 어떤 그룹은 빵 만드는 마을에서 빵을 만들고, 이콘을 배우고, 떼제, 음악, 공연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2000여명의 청년들이 총 95개 그룹(각 그룹은 3-5개 나라 청년들로 구성)으로 나누어져, 폴란드 전역, 체코,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속한 그룹은 “사회봉사”였는데, 저를 포함애서 한국, 스페인, 독일 청년들로 총 22명이 한 그룹으로, 반은 장애아 시설로 갔고, 제가 속한 조는 교도소를 방문해서 수감자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저의 강론은 마지스체험과 복음에 대한 성찰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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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스체험
한국에서 교도소에 가서 수감자들을 만나본적이 없습니다. 몇 년 전, 제주 강정에서 해군기지반대 운동을 하다가 몇 달 감옥에 갇힌 우리 예수회 형제들을 면회한 적이 있지만, 전혀 모르는 수감자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곳에 가기 전에, 도대체 그들을 만나 무엇을 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걱정도 되었습니다.
교도소가 그렇듯이, 높은 담에 철조망이 쳐져있었습니다. 우리가 만난 수감자들을 만나기까지, 여러 문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문이 하도 많아서 다음날 세어보니까 15개나 되었습니다. 문은 모두 육중한 철근으로 된 문이었습니다. 400여명의 수감자들이 있는데, 13명의 수감자들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만나서 하는 일은 그저 함께 노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교도소 내부를 잘 모르지만, 교도소 내부에 레크레이션을 할 수 있는 큰 공간이 있었습니다.
매일 같이 그곳에서 탁구, 베드민턴, 다트도 하고, 여러 게임을 했습니다. 커피와 케이크도 먹고, 서로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같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수감자들로 구성된 밴드가 있었습니다. 기타, 베이스, 드럼 ... 특히 그 밴드의 리더격인 사람이 노래를 아주 잘했습니다. 물론 폴란드어로 했고, 가이드가 영어로 통역해주었습니다.
교도소 방문 마지막 날, 공연이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은 노래를 여러 곡 불러주었고, 저희들도 준비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이 부른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었는데 제목이 “나쁜 아빠”. 수감자 중의 한 사람이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내용은. “우리 중의 누구는 오랫동안 아이들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나는 20년이 넘게 내 아이를 보지 못했어요, 나는 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이런 내가 아빠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나쁜 아빠예요...”
저희가 만난 수감자들은 대부분 장기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동안 그곳에서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덩치도 컸고, 몸에 문신이 많았습니다. 소위 조폭 같은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이 한결같이 순해보였습니다. 운동하고 노래하면서 환하게 웃기도 하고, 운동에 이기면 좋아라하고, 우리한테 져주기 위해 눈에 뻔하게 보이는 실수를 하고...
마지막 날 미사를 했습니다. 강론 때 저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여기에 왜 왔는지 모릅니다. 그 무엇 때문에 당신들이 이곳에서 살아가겠지만, 저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의 삶의 이야기가 있고, 이유가 있고, 자신이 진정 원하지 않는 곳으로 삶이 흘러가기도 합니다. 지난 과거에 대해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당신들의 과거를 만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눠준 당신들의 환대와 우정의 마음을 만났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만났습니다. 저는 당신들을 존중합니다. (그저 듣기 좋아라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의 진심이었습니다). 같이 노래하고 운동하고 차 마시고 게임하며 지낸 지난 5일, 저의 마음은 편했습니다. 당신들을 만나서 즐거웠고, 저의 가난한 기도 안에서 당신들이 들어와서 감사롭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쁜 아빠가 아닙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보고싶고, 사랑하는 그 마음만으로도 아빠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하느님께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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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대한 성찰
오늘 예수님은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라는 물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먼저 좁은문이란? 그 문이 넓다, 좁다라는, ‘문의 폭이나 넓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문으로 상징되는 좁은 문에, 극소수의 인원만 들어간다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 나라 안에 있고,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즉 구원의 특권의식을 갖고 있던 너희 유대인만이 아니라, 바로 이방인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라는 것을 보면, 그 좁은 문에 수많은 사람이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고 하자, 사람들은 항의합니다. “무슨 소리예요? 바로 저희가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잖아요?” 그런데 우리를 모른다니 말이 되요? 그런데 집주인은 또 다시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환장하겠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무엇을 통해 그 누군가를 안다고 할까? 그저 함께 밥 먹고 술 마셨다고 해서? 어느 교수로부터 수업을 한번 받았다고 해서? 이런 체험을 통해, 그 사람이 누구고,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복음을 보면, 그저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들었다고 해서 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는 말이, 너희는 내게 생면부지의 사람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희가 무엇을 했는지’, ‘주변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는지’, 단적으로 말해서, ‘너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불의를 일삼는 자”라는 것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삶, 진실하지 못한 삶,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 배를 채우는 삶 ...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고 물었던 그 사람은, 구원의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 율법학자, 바리사이 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첫째라고 생각하는 너희들은 꼴찌가 되고, 꼴찌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방인들,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힘이 없는 이들, 소위 빽이 없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 자리에 차지할 것이다.
결국 “좁은 문”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삶, 삶의 내용, 삶의 질과 관련을 갖습니다. 구원이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복음의 가치(Values)를 살아가고, 하느님 안에서 내 삶이 완성되는 것,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 궁극적으로 내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최상의 선물이고,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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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교도소에서 들었던 노래, “나는 나쁜 아빠예요” ... 참 슬픈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곳에서 살다보니, 이제야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어요. 그것은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
미사는, “나를 죽기까지 사랑했던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이 나를 살아가게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하고, 무엇을 향해 걸어가야 할지를 마음으로, 가슴으로 전해줍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것... 그 사랑이 나를 하느님께 이끌어 갈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제시한 좁은 문은 무엇일까요? 예수회를 창설한 성 이냐시오의 영성에 따라서 좁은 문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좁은 문은 ‘실재에 대한 사랑’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물질과 식물, 동물, 인간들에 대한 깊은 애정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 존재해야 할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Finding God in all things!”,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라는 영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냐시오는 회심하며 하느님과 내면의 교류를 배울 시기에 만례사라는 고장의 까르도넬 강가에서 물결모습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피조물에 대한 집착은 경계합니다. 그것은 실재자체이신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봉사하려는 마음 때문에 그 밖의 모든 것은 필요한 만큼 사용하고, 필요하지 않는 만큼 사용하지 않는 불편심을 갖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부유함과 건강과 장수함을 가난과 병고와 단명함보다 더 우선적으로 택하지 않는 태도 역시 ‘하느님을 사랑하고 봉사하는데 도움이 되는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결과이지요. 예수회원들은 선교지에서 원주민들의 미적 감각과 지혜와 전통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복음의 씨앗을 찾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실재에 대한 사랑과 실재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를 먼저 구하여라. 그러면 그 밖의 모든 것은 그 분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라고 우선순위를 알려주셨지요.
둘째는 “죄 중에 있는 세상 관상하기”는 좁은 문에 이르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회심하였고, 그 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가톨릭교회의 성사생활에는 신자들이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태도가 밑바탕에 깔려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한계와 오류를 인정하고 하느님과 이웃과 화해함으로써 진정으로 용서받고 새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진정한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것이지요.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연환경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내 자신의 생존과 안위를 위해 다른 생명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속이는 일을 합니까.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자연과 이웃과 화해할 뿐 아니라 더불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매일 일과를 마치며 양심성찰을 하는 것도, 피정을 통해 우리 삶을 관조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의 화해와 일치가 있고, 이를 위해 자연과 이웃과의 관계를 살피고 성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해선 관대하면서 이웃과 세상의 죄에 대해선 인색한 태도는 스스로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 인류의 죄를 가엾이 여기고 스스로 죗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를 졌으며,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이들을 용서하시며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셋째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희망의 표지인 십자가를 체험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제 목숨을 잃을 것이고, 하늘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성 이냐시오도 종교개혁 당시 늦은 나이에 회심하고 예수님을 갈망하고 따르는데 교회와 사회로부터 많은 오해와 박해를 견디어 냈어야 했습니다. 예수회를 창설하기 전 로마로 들어가면서 이냐시오는 ‘라스또르따’ 경당에서 신비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성부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께 “이 사람을 너를 따르는 이로 받아 주어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이냐시오는 로마에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두렵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르고자 기쁜 마음으로 로마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 시대의 아픔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아냈기 위해서는 항상 십자가를 우리의 영광과 구원의 표징으로 여겨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 십자가 없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것이라 할 수 없다고 프란치스코 교종은 말씀하셨지요.
넷째로 좁은 문으로 힘차게 들어가려면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행위’를 나의 삶 한가운데로 가져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 굶주리고 목마르며, 병고에 시달리고, 감옥에 갇힌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들을 잘 돌보도록 초해하셨지요. 빈둥빈둥 놀고 있는 이들을 불러 포도밭에서 일하게 하고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똑 같이 임금을 지불하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 등의 예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할 뿐 아니라 이들의 마음을 배우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도 “현대의 성인들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하면서 인정 없고 비인간적인 경제체제에서 말없이 가난과 병고를 견디어 내며 살아가는 노숙자, 실업자, 가난한 이들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셨지요. 우리는 우리 주위의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돌보는 봉사자일 뿐 아니라 이들과 친교를 나누며 이들로부터 배울 관대한 마음이 있나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모든 실재하는 것을 깊이 사랑하고, 죄 중에 있는 세상을 측은하게 여기며, 나의 십자가를 희망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특히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위해 애쓰는 가운데 우리는 하늘나라의 좁은 문을 들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