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31 연중 제 17주일 미사 강론(김우선 신부)

서강대 미사 강론
(Lk 9,51-62, 2016년 7월 31일 일요일 연중 제 17 주일)

이냐시오가 서강 청년들에게 말하다

서강의 청년들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아마 여러분 대부분은 저에 대해 잘 모르거나 피상적으로만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 대해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회를 내가 창설했다든가, 또는 서강대가 예수회대학이라든가, 또는 로욜라도서관이란 이름이 나의 출신지에서 온 것이며, 여기 이냐시오성당이 내 이름에서 온 것이라는 식으로 알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하지만 여러분이 내게 “자신을 스스로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하고 묻는다면, 저는 ‘예수회의 창설자’라는 식으로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찍이 자서전적 이야기에서 말했듯이, 서슴지 않고 ‘순례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순례자입니다. 처음 20후반까지 세상의 허영을 쫓아서 살았습니다. 내 시대 청년들처럼, 기사가 되어 큰 공적을 쌓고 출세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부상을 당하고 로욜라의 병상에서 회복하던 중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일생은 하느님께 가는 순례가 되었습니다. 로욜라에서 시작해서 (만레사) 바르셀로나, 예루살렘, 살라망카, 파리, 제노바, 베네치아, 로마 등 유럽의 주요 도시를 다녔습니다. 이 순례는 현대 젊은이들이 세계 각지를 다니며 배낭 여행하는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심 후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자 했던 계획들이 벽에 부딪치며 새로운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그래서 한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가는 방식으로 유럽을 다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생에서 좌절이라고 하는 순간들이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된 셈입니다. 돌아보면 하느님은 그런 방식으로 나를 이끈 것 같습니다. 프란치스코나 도미니코 성인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했던 적 있지만, 결국 하느님은 내가 남이 아닌 이냐시오가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런데 순례자로 살고자 한 나를, 하느님은 역설적으로 여느 기사보다 더 유명하게 만드셨습니다!)

계획이 벽에 부딪칠 때

어떤 청년들은 “계획이 벽에 부딪칠 때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결정을 내렸습니까?” 물을지 모릅니다. 이 물음은 21세기 초반을 사는 한국--누구는 ‘헬조선’이라 부르는--청년들의 불확실한 현실과 불안정한 내면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제 답변은 단순합니다. 회심 후 저는 하느님만이 절대적이고 다른 사람이나 사물은 모두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하느님 뜻을 찾았습니다. 내 계획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은 하느님 뜻이 아닐 수 있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나와 다른 이의 실패와 죄악과 상처 모두를--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체험으로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순례

내 계획을 수정했던 여러 순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사로 출세하고 싶었는데, 부상을 당하며 새 삶에 대해 눈뜨게 되었습니다. 나는 회심 초기 은수자처럼 살고 싶었는데, [만레사에서의] 영혼의 씨름을 통해서 사람을 돕는 생활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서 삶을 마치고 싶었는데, 거기에서 지도자에게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내 계획이 뒤틀어졌습니다. 다시 하느님 뜻을 숙고하게 되었고, 만학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공부 중에는 살라망카에서 종교재판도 받았습니다. 몇 주간 감옥에 있으면서 하느님 뜻을 다시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파리로 떠나가는 결정을 하게 되었고 거기서 첫 동료, 파브르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도반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 안의 우정으로 모인 우리 그룹은 예루살렘을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막히고, 교황님은 우리를 분산하여 파견하려 했습니다. 저와 친구들의 우정은 중대한 순간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 아니면 그냥 개인으로 흩어질 것인가? 공동으로 하느님 뜻을 찾으면서 우리는 예수회 - 더 정확한 번역으로는 ‘예수의 친구들’- 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회를 창설했으니 이제 안심해도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막 시작한 예수회를 좋아하지 않던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예수회에 대한 하느님 뜻을 다시 찾기도 했습니다. 당시 새하얗게 놀란 내 얼굴을 동료들이 눈치채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나는 세상적인 안목에는 보장되지 않은 불안정한 삶을 늘 살았습니다. 내 계획은 끊임없이 벽이 부딪쳤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안주할 수 없었고 하느님의 뜻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실망이나 남에 대한 원망 대신, 하느님과 더 깊이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삶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계획보다 더 나은 결실을 맺게 된 것을, 지금은 더 뚜렷이 보게 됩니다. 역설입니다. 그래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하느님과 사람을 배우는 학교요, 하느님께 가는 순례라고!

서강 청년에게 마지막 한 마디

다시 말하지만 나는 청년 시절 허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내 계획이 틀어지면서 비로서 하느님 계획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청년 여러분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자신과 남들의 죄와 상처에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세상의 평가를 두려워 마십시오. 벽에 부딪치면--그런 일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겸허히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하느님과 소통하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