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미사 강론 (Lk 9,51-62, 2016년 7월 10일 일요일 연중 제 15 주일)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한 주간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먼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초대해 주신 교목처 가족들께 감사를 드리고요. 방금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저는 지난 29일날 새로 서품된 여명모 하상바오로 신부입니다. 이렇게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간략히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이곳 서강에서 3년간 철학을 공부했고요, 성소실에서 예수회를 지망하는 형제들과 함께 2년을 보내고, 대만으로 건너가 보인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사제로 서품을 받았습니다. 방금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는 소제목이 달려있는 구절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여라.”라는 구약의 계명에 그치지 않고, “네가 먼저 다른 이들의 이웃이 되어주어라.”라는 사랑의 계명을 들려주십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쉬운 내용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면 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 입니다. 여기 어떤 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몇 달 전부터 약속한 아주 중요한 미사에 집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강도를 당해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어떻게 할까? 그 사람을 도와주자니 부정을 탈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면 그날 미사는 드릴 수가 없게 됩니다. 게다가 그날 미사는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하는 아주 중요한 미사였거든요. 순간 고민 끝에 그냥 지나치기로 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갑니다. 그 사람 또한 중요한 모임에 가서 강의도 해야 하고, 후속 프로그램을 위한 회의도 진행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빠지면 그날 모임은 진행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이 레위인도 바삐 발걸음을 옮겨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인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인 태도는 어쩌면 우리들과 똑같은 모습 그대로 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인 우리들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습니다. 그 사람을 도와주어라, 그 사람을 용서하여라, 그 사람과 화해하여라,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 남에게 좋은 말을 해주어라, 남에게 화를 내지 말아라 등등. 하지만 우리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내가 저 사람을 도와주더라도 그 사람은 나의 호의를 모를거야.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고 화해를 해, 그는 나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인데. 좋은 말을 해주라고? 그 사람은 남들 앞에서 나의 험담을 늘어놓고 다니는 사람인 걸. 저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나요?? 저는 묵상 중에, 우리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까닭은 어쩌면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남한테 선한 일을 해주고도 그 대가를 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호의를 베풀었다가 오히려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는 두려움, 다른 사람 챙겨주다가 내거 챙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우리는 흔히 하느님의 뜻을 찾겠노라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곤 합니다. 하지만 정작 하느님으로부터 초대를 받게 되면, 이러한 각종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의 목소리를 외면하곤 합니다. 저는 이번에 서품 상본을 준비하다가 요한복음 21장 19절에 있는 “나를 따라라.”라는 구절을 선택하였습니다. 복음 성구의 원래 말씀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입니다. 이 복음 구절은 저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인데요. 예수회 입회 전 피정에서 이 복음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3번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는 장면 후에, 갑자기 저를 돌아보시며, “나 따라올래?”하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씀은 제게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너 나따라오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어쩌면 네가 지금 두려워하는 일들이 앞으로 벌어질지도 몰라.” 이러한 예수님의 초대는 당시 제게는 아주 큰 도전의 말씀으로 들려왔습니다. 저는 두려움 속에서도 “네”라고 짧게 대답을 했었고, 이후 실재로 많은 도전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두려움에 직면하는 순간순간마다 주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오늘, 때로는 몇 달 후에, 혹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제 기도를 들어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응답이 저를 지금 이 자리에까지 이끌어 주셨습니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신앙여정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는 회피하려 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만을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이 실재 우리네 삶에서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세에서의 영화로운 삶을 추구하고, 죽음 후에 있을 부활의 생명에 대해서는 쉽게 간과하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역사하심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부활의 삶을 추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영위하고자 하면 할수록 현세에서의 삶 속에 그분의 평화를 주십니다. 실제로 세상은, 내가 처한 환경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기대하지 마세요. 다만 주님은 나를 변화시키심으로써 세상을 바꾸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모두 주먹을 꼬옥 쥐고 태어납니다. 살기 위해 내 것을 꽉 쥐어야만 하니까요. 어쩌면 살기 위한 발버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손을 펴고 죽어갑니다. 나의 손을 펼 때, 내 것을 내려놓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의 마음을 각자의 심장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심장이 뛸 때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생명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 내면 깊은 곳의 목소리를 통해 부르시고, 또 우리가 거기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비롭고 사랑에 넘치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네”하고 응답하기만 하시면,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역경을 이겨낼 힘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제도 레위인도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실천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고, 자신의 것을 더욱 꽉 쥐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에 응답함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1독서 신명기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