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미사 강론 (Lk 9,51-62, 2016년 6월 26일 일요일 교황 주일) 강론에 앞서 오늘 특별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이 교황 주일이라는 점입니다. 교회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황께 서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대리자, 그리고 로마 교구의 주교이시며, 전 세계 가톨릭 교회를 지도하고 통솔하는 최고의 사목자이십니다. 오늘 미사를 통해 그분의 위치와 역할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긴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람들은 흔히 ‘야, 너무 긴장하지 마라’, ‘너 지금 긴장하는 것 같은데?’, ‘긴장 좀 풀어라’하면서 좀 느슨하고 편안하라 고 말합니다. 긴장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뉘앙스입니다. 물론 지나친 긴장과 경직성은 삶에 해악을 끼칩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우리는 건강한 긴장을 필요로 합니다. 동서고금의 현인들은 중용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이 중용을 건강한 ‘긴장’에 비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용은 정중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가장 알맞은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현악기의 줄이 너무 느슨하지도 않고 너무 팽팽하지도 않은 적당한 긴장을 유지할 때에 아름다운 음을 만들어낼 수 있듯이 말입니다. 줄이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말 기에, 악기의 줄은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매여 있어야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하느님께서 라오디케이아 교회에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 리겠다’고 하시듯이, 중용의 미덕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함이 아니라 뜨거워야 할 때에 뜨겁고 차가워야 할 때에 차가운 것을 뜻합니다. 냉커피는 차가워야 하고 설렁탕은 뜨거워야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중용을 지켜야 할까요? 언제나 그러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모범을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찾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단호한 발걸음을 하십니다. 복음은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 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고 전합니다. 이 때의 예루살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공간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당신께서 오신 뜻을 이룰 상징적인 시간과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 곳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복음이 결코 텅빈 공약이 아니라 참으로 실현될 진리임을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실 사건이 벌어질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곳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진리를 이루시고자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징벌과 저주가 아니라 용서와 이해를 보이십니다. 진리를 향한 당신의 태도는 단호하지만, 그 단호함은 엄격함 만이 아니라 온유함과 관대함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호함은 중용을 이루는 단호함이자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긴장을 담고 있는 단호함입니다. 어느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의 엄격함과 더불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온유함과 관대함을 함께 품어야 하는 삶에는, 매순간 그 때에 가장 올바른 선택이 있을 뿐이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획일적인 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대목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는 어떠한 삶의 자리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자리는 다양한 모습을 지닙니다. 때로 어떤 방식의 제자직은 정처 없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떠도는 삶의 모습을 띠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한 제자직은 돌아가신 분의 장사도 치르지 못하고 한 번 잡은 쟁 기를 놓지도 않아야 하는 단호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명하심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른 순명과 함께 중용의 긴장을 이룹니다. 무턱대고 강요되는 제자직이 아니라 우리의 응 답을 통해 그 제자직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너희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셨듯이, 이 모든 것의 핵심은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 한 예루살렘도 결국은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장소입니다. 우리 삶의 참된 긴장은 바로 예루살렘을 향하는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드러나는 긴장인 것이며 우리가 살아내어야 하는 긴장인 것 입니다. 여기서 저는 제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과연 나에게는 예루살렘이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즉 내 삶에 목적지가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예루살렘은 하느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무런 목적지 없이 대충대충 걷는 삶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확고한 목적지를 향한 삶입니다. 온갖 가치 기준 이 난무하는 이 시대, 무엇이든지 좀 더 편하고 멋있어 보이면 무조건 따라 가는 시대, 상대주의와 주관주의가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이미지와 무한 경쟁만을 소비하는 시대에 그리스 도인인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확실한 기준점이자 목적지로 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때로 희생과 포기를 요구하기에 우리에게 적잖은 긴장을 주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몸소 보여주시는 진리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숙고도 필요하고 그 진리가 반드시 어둠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성찰과 숙고는 결코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믿음과 희망도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이 성찰과 숙고와 용기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교회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이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고 서로서로 힘이 되어 주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혼탁하고 어두운 시대라도 지금 이 현실을 넘어서서 , 그러나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이 담은 진리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굳은 믿음과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강론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교황 주일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교황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우리 신앙의 공동체를 책임지고 이끄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러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살아가시는 만큼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하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상기하면서 우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서도 기도드리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