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12 연중 11주일 미사 강론(김학준 신부)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서 지옥을 경험한다.”
이 말은 프랑스의 철학자 쟝 폴 샤르트르가 했던 말입니다.
인간은 타인에게 한없이 관대할 수 있지만, 반대로 아주 매몰차고 몰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매몰찬 모습에서 우리는 사랑과 기쁨이 없는 지옥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따뜻한 천국을 느꼈다면, 바리사이를 통해서는 아주 차갑고 무서운 지옥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선과 인간의 시선이 다르다는 사실,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눈빛은 바로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느끼게 된 따뜻함과 죄스러움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이해했고,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보다는 그 사람이 지금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에 예수님은 더 초점을 두셨습니다.

예수님과 달리, 바리사이는 처음부터 여인을 죄인이라고 낙인찍고 상종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따뜻하게 대하는 예수님을 줄곧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죄인은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비난을 받았던 것 가운데 한 가지도 바로 세리나 죄인과 어울렸다는 것이죠.

예수님과 바이사이의 대조적인 모습은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만듭니다. 나는 어떤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외적인 상태를 바라보는가? 누군가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고, 많은 것을 누리고 있어서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있다면, 그것이 부러운 나머지 나 역시 똑같이 그런 상태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 사람의 삶은 어떤지 들여다보지는 않습니다. 사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피상적인 것을 보고 그것을 닮으려 할 뿐입니다.

요즘에는 공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지금은 이 공감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사회가 되었지만, 정작 어떻게 공감하면서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무조건 좋은 성적을 만들어내라고 하고, 사회에 나가면 사회적 지위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리기 때문에 내 마음에도 신경 쓸 겨를이 없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신경 쓸 겨를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적응을 하면 나면, 결국 일을 잘하는 사람은 될 수 있어도 인간다운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기쁘고 충만하게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우리에게는 공감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하는 수업이 지식을 머리속에 담는 유형의 주입식 수업이 아니라, 학생들의 감정을 끌어내고 그 감정을 통해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도록 초대하는 수업이다보니, 아무래도 학생들의 행동이나 말, 표정에 주의를 많이 기울이게 됩니다. 얼마나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걸 어려워하는지도 쉽게 느낍니다. 예전에는 누구와 만나면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의 얘기를 듣기라도 해야했다면, 지금은 굳이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휴대폰이라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주고, 굳이 상대방에게 관심을 안 두어도 되는 안전지대를 형성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더 약해집니다.

이 공감은 용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일상 안에서 자잘한 다툼과 분노를 겪으며 나에게 잘못한 상대방을, 나를 힘들게 한 상대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해서 용서도 잘 안 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바로 상대방에 대해 공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용서라는 한자말은 담을 용(容)과 용서할 서(恕)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恕라는 말은 같을여 如와 마음 心이 합쳐진 글자로서, 마음을 같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상대방의 마음과 같게 하여 내 안에 담아내는 것이 바로 용서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고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그 사람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하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라기 보다는 내가 베푸는 하나의 은혜와 같은 것이 되어버리죠.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용서의 주체가 됩니다. 내가 용서를 해주었기 때문에 상대방은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내 안에 담으면 용서는 자연스레 따라올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을 하는 것. 사실 이것이 우리가 용서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발걸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 특히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 즉 “너희가 하느님께로부터 죄를 용서받았으니, 너희도 용서받은 만큼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라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에게는 이웃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것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더욱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시인 박성철님은 “용서”라는 시를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용서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것은
더더욱 좋은 일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을 때, 어쩌면 용서라는 말은 우리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 안에서 살아있는 삶의 언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