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는 신비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은 교의입니다.
성경에서도 삼위일체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있어도, 명확하게 삼위일체를 지칭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가 고대 종교들 안에서 보이는 다신론적 입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삼위의 하느님은 세 분의 다른 하느님이 아니라, 한 분의 하느님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한 분의 하느님이 세 가지 다른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이시면서도 그 안에 개별성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론으로 먼저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자들이 체험하였고 초대교회 공동체가 체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이론으로 정립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체험하였고, 성령강림을 사건 등을 통해 성령의 활동을 직접 겪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이 삼위일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하나의 신앙고백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태초에 있던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 찬가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성부와 성자를 이해할 수 있다해도, 과연 성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성령은 삼위 안에서 어떤 위치인가를 두고 초대교회 때부터 의견은 달랐습니다. “성령도 성자와 마찬가지로 성부로부터 나는가? 아니면 성령께서 성부와 함께 성자로부터 나는가?” 이것이 아주 유명한 ‘필리오꿰(Filioque)’논쟁인데, “성자에게서”라는 뜻입니다. 원래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그리스어 원문에는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하시고”만 있었는데, 그 뒤에 서방교회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고 “필리오꿰”라는 말을 첨가하였고, 이것이 동방교회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면서 나중에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서로 분열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결국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강생하시어 성부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시고, 죽음을 통해 인간의 모든 죄를 씻어주신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아닌 아버지의 나라를 추구하셨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가 아닌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며”라는 식으로 내용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토록 아버지의 나라를 구하고자 한 것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께 대해서도 강한 신뢰를 보여주십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광야에 가서 40일간 단식을 하셨던 것도 그렇고, 특히 요한 복음을 보면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라고 말씀하십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결국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사랑과 신뢰의 관계 안에서 이루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 갈라서고 나누어져 반목하고 질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공동체 안에서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제가 체험했던 것 한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얼마 전 제가 1년동안 사목을 했던 대구에 있는 한 본당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보아서 좋았지만, 그 중에서 저에게 무척 놀랍게 생각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 아이의 놀라운 성장이었습니다. 키가 엄청 커졌다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제가 본당에 있을 때는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이었습니다. 다른 아이와 시비가 붙으면 욕을 하다가 주먹이 먼저 날아갔고, 미사 중에도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성당 의자를 발로 차거나 쓰러뜨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당 주일학교 안에서 이 아이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은 것을 넘어서서, 다른 아이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니까 이 아이가 성당에 나오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어머니와 얘기하면서 아이가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는 얘기도 듣게 되었고, 일부러 때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방어가 가장 중요하다보니 먼저 공격적으로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이가 나쁜 아이여서라기보다는 가정에서 아이를 따뜻하게 돌보지 못했고, 학교나 사회에서도 아이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한 것이기에 아이를 탓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안고 가야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래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도 상황을 전하면서 더 많은 배려와 관심을 가져달라고 얘기했습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오고 1년이 지나 작년 이맘 때 갔을 때는 좀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은 분노가 남아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나서 올해 내려가니, 주일학교 학부모님들이 저를 먼저 붙들고 아이들이 키도 크고 많이 성장했지만, 가장 많이 변화된 아이는 바로 이 아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착실해졌고, 이제는 화도 안 내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며, 기도도 열심히 해서 7살짜리 동생을 데리고 매일 둘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래희망도 자기는 신부가 되겠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 아이가 치료를 받고 스스로 맺힌 것을 풀어내는 동안, 본당 주일학교 공동체가 그 아이에게 울타리가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아마 말은 못해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겠지만, 사랑과 신뢰의 마음으로 아이를 보듬어주었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이가 천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지지해주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그런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내가 상처를 받았다 해도 그것이 썩거나 곪지 않도록 치유해주는 그런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저 사람은 별나다거나, 화를 잘 낸다거나,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공동체의 사랑과 신뢰 속에서 치유되고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삼위일체의 신비가 우리 안에서 구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분열이 아닌 일치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일치의 삶이 처음부터 혹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신뢰에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다려줄 수 있는 마음과 그 사람이 치유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노력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일치를 지향할 수 있게 되고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고 봅니다. 일치보다는 분열을 조장하는 악을 멀리하고 일치와 사랑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의 하느님께 청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