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사도: 두 세계 사이 다리 놓기
부활5주 서강대
[시작]
지난 주는 성소주일. 아마 성소이야기 들었을 것. 오늘 1독서는 사도행전, 바오로의 첫번 선교여행 이야기. 바오로사도는 고등학교시절 처음 신약성서 읽으면서 좋아하게 된 사도. 시간이 흐르면서 더 그분을 알고, 오늘날 한국인의 지평에서 그분 같은 사도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강론에서 그분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도가 있는지, 넓게는 내 삶에 영감을 불어 넣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자문해보자. 그분을 잠시 음미하면서 미사를 봉헌하는 마음을 준비하자.
[강론]
[부활시기 걸쳐서 1독서에서는 사도행전을 듣는다. 12장까지는 베드로사도가 중심이지만, 13장부터 마지막 28장까지는 바오로사도가 중심이 되고, 특히 3차례에 걸친 그의 선교여행이 나온다.] 기억하면 바오로사도와의 만남은 고2 시절 누나가 적어 준 성경귀절이 마음에 닿아서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본격적인 만남은, 앞서 말한대로, 회심하고 성서를 읽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고, 곧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그의 회심, 또는 그의 삶에 중요한 사람들, 또는 그의 신학 등등 몇 시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10분 가량의 강론에서 그런 것 할 수 없다. 그래서 무엇을 말할까 고심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2016년 한국에서 살아가고, 서강공동체에 오는 젊은이들에게 사도의 어떤 면을 소개해줄까 고심했다. 그리고 이것을 말하기로 했다: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은 바오로사도! 왜냐하면 그렇게 다리를 놓는 이를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기에!
바오로 사도는 팔레스타인지역에서 갓 시작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당시 지중해 세계의 그리스로마문명 세계에 스며들게 하는데 결정적 촉매역할을 했다. 알다시피 예수님의 12제자는 주로 변방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 세리 등 유다 문화적 배경만 가진 이들이었다. 이들에 의해서만은 부활의 기쁜 소식이 당시 그리스로마문명에 스며들어가기 곤란했을 것. 그들은 그리스말을 몰랐고 channel 도 없었다. 그리스도교세계와 그리스로마문명세계의 다리 역할을 한 이가 바로 바오로사도.
바오로사도는 타르수스 (현재 터키지역)라는 태어난 유다인. 그의 서간 그리스어 실력으로 보아 좋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측. 사도행전은 당시 존경받던 율법학자 가믈리엘 문하에서 배웠다고도 전한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는 서구 문명의 양대 전통인 그리스문명과 유다교 전통이 녹아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유승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두 문화를 산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잘 융합되는 것 아니다. 그가 가진 두 문화가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그 안에서 녹아 들며 잘 융합되었다. 자기 안에서 화해를 이루었기에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오늘 사도의 이 측면을 부각하는 것은, 21세기 초 한국이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로 한국은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며 한국 내적으로는 서구와 동아시아가 교차하고 있기에, 오늘날 한국에서 잘 일하기 위해서는 두 문화가 융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세계교회 차원에서는 교회가 더 이상 유럽중심적인 교회가 아니게 되면서, 아시아나 아프리카 교회의 공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교회에서 한국교회의 공헌은 여기 저기서 이미 무척 가시적이다. 따라서 한국 대내적으로도 서구와 동아시아, 두 문화가 융합된 사람이 필요하고, 또 대외적으로도 두 문화가 융합되어 한국과 세계를 잇는 ‘다리’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신부님, 너무 거창한 이야기에요. 지금 중간고사 막 마쳤고 알바하고 진로 고민하는 내게 너무 먼 이야기에요’ 라고 하고 싶나요?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 성인들 대부분 역시 그런 ‘거창한’ 삶을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역사라고 할지 운명이라 할지, 소명이라고 할지 그런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런 삶을 살게 되었다.
아모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모 7:14-15)
이냐시오성인: 기획하지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중세적인 교회와 근대세계의 다리역할. 그는 당시 청년들의 로망이던 기사를 꿈꾸던 사람.
바오로: 자기 계획이 분명하던 사람.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지며 어떤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럼 사도처럼 살고 좋은 일을 하려면 바오로사도처럼 공부를 많이 하고 배경도 좋아야 하나요?’
바오로 자신은 자신의 출신이나 배경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필립비서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자부심있던 그 모두를 쓰레기에 비기었다. 중요한 것은, ‘내게 그리스도가 그렇게 소중한가?’ 이다. 그게 다른 어떤 공부나 배경, 자격증보다 우선한다.
젊은이 여러분, 21세기 한국은 이렇게 이중문화를 융합하여 다리역할을 할 사람을 찾고 있다. 한반도 주위를 보라. 강대강 대립하고 있는 남북한 사이에 화해의 다리를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이 동맹을 강화하고 있는 동북아에서, 한국은 누구 편에 설 것인가? 언제까지 긴장을 높이고 무장을 강화하며 군비에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가? 여기에 다리를 놓아야 하지 않는가? 독일과 프랑스는 19세기 후반부터 2차대전까지 70년간 3차례나 크게 전쟁을 하고도 화해를 해서 오늘날 유럽공동체의 기초를 놓았다. 유럽이 가능하면 동북아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한국사회 내부에도 다리를 놓아야 한다. 제주 강정에 갈라진 공동체는 그 현실. 또 양극화의 현실은 청년들의 삶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지난 주 KBS 다큐 “지옥고: 청년들의 방”에서 보았는가? 서강대 학생도 2명이 나왔다. 이렇게 세대를 건너서도 금수저니 흙수저니 양극화하는 한국사회 내부에 다리를 놓아야 하지 않는가?
바오로사도는 다리를 놓기 위해 그렇게 로마제국의 주요 도시를 걸어 다녔고,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당신 목숨을 바쳐 우리에게 당신 몸과 피를 주셨다. 우리가 받아 모실 빵과 포도주는, 화해의 도구, 다리를 놓는 도구가 된 주님이 주는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