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엊그제가 개강이다 싶었는데, 어느 새 부활절을 맞이했고, 이제 완연한 봄이 찾아 왔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 중에 체로키 족은 3월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 그러면, 4월은 무슨 달일까요? 4월은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마음이 움직여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품는 시기 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생의 기쁨”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고기잡이 이적을 보이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으신 뒤 당신 양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제자들의 삶은 삶의 수고에 대한 아무런 열매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한 아침 무렵에야, 제자들은 비로소 삶의 풍요와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자리는 새롭고 환상적인 장소가 아니라, 제자들의 익숙하고 반복되는 일상의 삶의 자리, 즉 어부로서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은 어떠합니까? 매일의 일상에서 어떻게 희망을 체험하고 발견합니까? 나의 진부해 보이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 한 일상은 어떻게 희망의 자리가 될 수 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 일상의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오시고 싶어 합니까? 나의 가톨릭 신앙은 어떻게 내 삶의 희망으로 기능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일상의 삶 안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희망을 살아간 이들이 있으니 바로 부활의 체험을 했던 사도들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 말씀은 사도행전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친교를 이루며 빵을 나누고 또한 많은 이적과 표징을 일으키며 기쁜 소식을 전하자, 사두가이파와 대사제들이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와 다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자, 성전 경비대장과 경비병들이 붙잡아 오고 대사제는 그들을 신문합니다.
얼핏 보면, 사도들의 삶은 예수님을 알기 이전보다 더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박해를 받고 있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협박이나 무력도 사도들의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희망과 그로 말미암은 자유로움은 꺾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기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상 삶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희망을 살아가는 가톨릭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저희학교 영문학과 교수님이셨던 고 장영희 마리아 선생님을 저는 기억합니다. 장 마리아 선생님이 척추암이 발병하여 무려 스물네 번의 항암치료를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희망을 가르치고 또 실제로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장 마리아 선생님은, 존 던의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 Death, Be not Proud"라는 시를 인용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번번이 죽을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겨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장 마리아 선생님의 좋아하셨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를 “희망은 한 마리 새”라고 번역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희망은 우리의 영혼 속에 살짝 걸터앉아 있는 한 마리 새와 같습니다. 희망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 . . 우리가 힘들고 슬플 때 손 내밀어 주는 우리 마음속의 작은 새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 . 이제는 정말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할 때, 가만히 마음속 깊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한 마리 작은 새가 속삭입니다. “아니, 괜찮을 거야, 이게 끝이 아닐 거야. 넌 해낼 수 있어.” 그칠 줄 모르고 속삭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호세아서 2장 16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거기에서 나는 그 여자에게 포도밭을 돌려주고 아코르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만들어 주리라. 거기에서 그 여자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응답하리라.”
여기서, 주님은 호세아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도밭을 돌려주고 아코르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만드시겠다고 합니다. 포도밭이란 풍요를 뜻하고 기쁨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그런데, 아코르 골짜기란 어떤 곳이었을까요? 아코르 골짜기는 대대로 위험한 협곡으로서 뱀과 전갈과 커다란 거미와 야생동물이 우굴우굴거려서 모두들 피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희망의 문으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곳은 곧 희망이 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아코르 골짜기 같은 곳이 있습니다. 쳐다보기도 싫고, 피하고만 싶고, 기억하기도 싫고, 가까이 가기 싫으며,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어쩌면, 내 일상생활이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아코르 골짜기를 마침내 희망의 문으로 만드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인도를 잘 따라 갑시다. 하느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을 부르시어 세례를 베푸시고 하느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미사를 통해서도 여러분을 당신 곁으로 계속 해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 순간 주님의 숨결과 현존 그리고 속삼임에 집중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다만, 주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실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내어 드리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희망은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희망은 주님의 커다란 선물로 . . . 우리에게 문제와 고통, 어려움을 넘어서, 우리의 죄를 넘어서 멀리 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합니다 . . . 이러한 희망의 덕을 지니고 있는 사람, 자기 생애의 좋지 않은 때에도, 곧 병이 들거나 자녀들 때문에 걱정해야 하거나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어떤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 희망을 잃지 않고, 고통 가운데서도 맑은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 너머를 . . . 언제나 저 너머를 보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희망입니다. 이것이 오늘 가톨릭 교회가 우리에게 주는 예언입니다. 어려움들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희망은 지평을 열어 줍니다. 희망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톨릭 신앙이란 곧 긍정적이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특별히 결정을 앞두고 있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젊은이 여러분, 결정을 하는 일에 두려워하지 마세요. 세 가지를 기억하세요. 첫째, 예수님께 물어 보세요. 둘째, 잘 준비하세요. 그리고 셋째, 주님을 신뢰하세요. 주님은, 여러분들을 결코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 자리에 결정을 앞두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여러분 자신에게 이 세 가지를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정하기 전에, 예수님께 물어 보고, 잘 준비하고,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강론을 마무리 합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희망이었습니다.
희망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동시에, 이 희망은 우리에게 주어진 회복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천주교 신앙인은 회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와 공생활과 죽음과 부활은 모두 하느님께서 지으신 창조질서인 보시기 좋았다고 하는 인간성의 근본적인 회복을 위함입니다.
회복하는 신앙인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쳐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 . .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자 같이 보이지만 실은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 신앙인이 고백하는 희망입니다.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인 4월에, 여러분 모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품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화답송으로 노래한 시편 30장을 기도드리며,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니, 주 하느님 영원히 당신을 찬송하오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