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3. 24  주님만찬성목요일 강론(정제천 신부)



오늘은 거룩한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는 성삼일의 첫날이다. 제2독서는 미사 성제 세우시는 대목을 읽었고, 복음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대목을 들었다. 이 두 가지 일은 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두 가지 중요한 행동이다. 죽음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이 죽음의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고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하여 제자들에게 행하신 이 일은 예수님의 유언과 같다. 예수님은 이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그날 저녁에는 그 뜻을 온전히 알지 못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온전히 깨달았던 것이다. 제3자인 우리는 오히려 그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 잘못을 용서한다. 너희는 가장 힘든 순간에도 내가 너희에게 무한히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말씀하시는 거다. 예수님께서 그 어떤 잘못도 다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거기에는 십자가상 죽음을 당하실 때에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가는 것까지 포함될 것이다.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여라, 고 말씀하신 그분이 용서 못할 죄가 없다는 것을 제자들은 이 날 저녁 뼛속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미사 성제는 “이것을 먹고 기운을 차려라. 일어나서 하고 싶은 일을 힘껏 마음껏 하거라. 내가 너의 힘이 되어주겠다.” 하시는 거다. 발씻음과 미사 성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자신을 바친 사랑의 완성이다. 사랑의 최고 형태인 발씻음과 성찬례, 용서와 성체성사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나다. 그래서 작은 죄들은 미사 때에 성체를 영함으로써 사해진다고 믿는 것이다.

오늘 예식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섬김의 마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동서 고금의 어떤 가르침도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동양의 성현 부처님과 공자, 맹자를 생각해 보자. 그분들의 가르침과 삶을 오늘 예수님의 행동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랑을 받아보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게 된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알아들어야 한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안다.

동물학자에게 들은 이야기다. 인간만이 말을 할 줄 안다. 그래서 인간만이 말로 가르친다, 아니, ‘말로만’ 가르칠 수 있다. 동물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배가 고플 때에 어떻게 먹이를 구하는지, 짝짓기를 할 때에 어떻게 상대를 고르는지, 새끼에게 먹이감을 어떻게 가져다 주는지를 행동으로 가르친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 나라 좋은 나라.” 라고 말로 가르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은 동서 고금의 어떤 위인도 주지 못한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뼛속 깊이 새겨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실천하였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넘어서 넓은 지역에 전파될 수 있었다. 복음의 힘은 어느 것 하나로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섬기는 자가 다스린다’ 는 섬김의 리더십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여러분 중에서도 저와 같이 겸손한 섬김의 모습에서 예수님께 반한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오늘날 ‘리더십’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한다. 예수님은 진정한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려는 이는 말째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발씻음과 미사 성제는 이 말씀을 실천하신 것이다. 언행일치와 섬김의 리더십, 하면 누구보다도 교황님이 떠오른다. 그분의 수련자였던 기예르모 신부님은 “교황님의 말씀은 실생활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 요즘 무슨 말씀을 하시면 옛날에 있었던 어떤 상황과 바로 연결이 되어 떠오를 정도다.”라고 했다. 17살 소년이 베르골료 신부님을 찾아가서 성소 상담을 하고 그 신부님 밑에서 수련을 받아 지금은 57세가 되었다. 그가 신학생이었을 때에 하루는 신부님과 면담을 하고 나왔는데, 노트를 안 가지고 나와서 다시 가지러 들어갔는데, 그때 신부님이 복도 가운데에 있는 공동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변기를 닦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교황님이 예수회원의 양성, 훈육을 담당하였을 때에 그분은 예수회의 교육 방침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매우 강조하셨다고 한다. 공부를 할 때에도 매주 한 나절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는 주말 사도직을 실천하도록 강조하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아신다.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다. 이론가가 아니며 직접 해보고 거기서 배우는 분이다. 또 하느님 백성 안에서 배우는 분이다.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단다. 교황님은 한국에 오셨을 때에 마지막 날에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가지 빠트린 것이 있다. 가난한 교회가 되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되자는 말은 많이 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교회가 되자는 말을 미처 못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이 말을 전해주기 바란다. 예를 들어서, 부자가 꽃동네에 가서 ...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지난 토요일에 교황님이 주교 서품식을 집전하시면서 강론 때에 주교직이 명예가 아니라 봉사의 직함이라고 하셨다.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한 직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교회 쇄신의 열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혁신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 사실 주교나 사제가 아니라도 소위 ‘봉사직’은 많다. 공무원을 공복, 즉 공공의 종이라고 불렀다. 헌법에서도 “공무원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한다. 국회의원, 시장, 도지사와 같이 선거로 뽑는 정치지도자는 모두 봉사를 위한 직무이다. 그래서 선거를 할 때에는 국민을 위해서 견마처럼 봉사하겠다고 약속들을 한다. 그러나 그때뿐인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서 공복을 뽑은 것이 아니라 상전을 뽑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러나 봉사직은 이것만이 아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 선생이 된다는 것, 선배가 된다는 것, 회장이 된다는 것, 모두에 봉사냐, 지배냐의 갈림길이 있다.

예수님의 수고 수난을 기리는 성삼일을 시작하면서 저는 예수님의 발씻음에서 두 가지를 되새기자고 초대한다. 첫째, 섬김의 리더십을 위해 기도해드리자. 우리 모두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회가 진정 하느님 나라의 예표가 되기를 바란다. 아시다시피 지상의 교회는 매우 위계적이어서 지도자인 주교와 사제가 중요하다. 그분들이 서품 때에 결심하고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약속한 대로 섬김의 삶을 살아가신 예수님을 본받아 살 수 있도록 기도로써 응원하고 도와야 한다. 둘째, 우리가 리더인 그룹에서 지배하는 리더가 아니라 섬기는 리더가 되자. 가정에서, 회사에서, 써클에서, 연구실에서, 나는 지배하기 위해 내 직책을 쓰는 사람인가, 섬기기 위해 쓰는 사람인가?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