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24 원조주일 미사강론(염영섭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놀랍기만 하다.
회당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강론으로 아주 감명을 받았다.
예수님이 희망과 사랑이 가득한 희년을 선포하신 것에 대해서 놀라움과 찬양이 있었지만, 성서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과 메시아로써의 역할을 언급함으로써 배척과 죽음이란 위기에 처해있다.
여기서 저는, 예수님은 어떻게 강론을 했을까?가 궁금합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전례를 하려면 적어도 10명의 남성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모인 회중은 신명기 6:4-9에 기록된 고백인 쇄마를 암송합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주어라.

이렇게 암송한 다음, 함께 기도합니다.
그 다음, 율법 책인 토라를 읽고 그리고 예언서의 본문을 히브리어로 읽고, 그 지역의 언어인 아람어로 번역되어 다시 읽습니다.
그 다음에 해석인 강론을 한 후, 마지막으로 축복을 합니다.
< 이것이 안식일 전례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셨다.” 그리고는 “오늘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회당에서 이사야서 낭독과 한 구절의 말씀으로 어떻게 예수님은 청중에게 감동을 주었는가?

1) 성서구절 선택으로, 이사야 61:1-2을 인용하셨을뿐만 아니라 그 안에다가 이사야 58:6을 암시하는 내용도 섞어서 읽으신 후,
2) 이본문을 시대의 요청에 맞게 해석하여, 희망의 말씀인 은혜로운 해를 선포 하였습니다.
3) 청중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의사소통을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드럽고 권위있는 말씀에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서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통이 바로 군중들이 모두 칭송과 예수님에게서 눈을 뗄 수 없고, 그리고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은총의 말씀에 청중들이 놀라운 반응을 보였고 그리고 주님의 메시지 내용에 압도당하고 당황스러워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예수가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이 솟꾸쳐 올라온 것이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인데, 어떻게 이사야가 선포했던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그런 인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예수님의 족보-나자렛에 목수인 요셉의 아들과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님의 주장을 조화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놀라워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한다.
비교와 의심으로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는 군중들의 선택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어떻게 인간인 예수가 하느님이 될 수 있는가?
질문은 “한분이신 야훼 하느님”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희망의 메세지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제한되어있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구약성서에 ‘아나윔’- 경건한 사람들-은 고통당하는 사람들로 언급합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열려있는 고통당하는 예언자들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얼마나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지를 다른 누구보다 가장 먼저 인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그분의 길에 대해서 열려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열려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함께하고, 눈이 먼 장님에게서 빛을 주고, 억압에서부터 해방을 선포하신다.
이러한 희년은 모든 부채가 탕감된다고 선포되며, 누구에게나 새로운 출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시고 그리고 교황님은 지난 12월 5일 ‘자비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자비의 해를 맞으면서, 이웃과 세상에 관대하기 위한 세 가지를 제안합니다.
1)우리들 그리고 교회도 현실을 대면하면서 비판과 평가를 수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 거울을 자기 얼굴에 갖다 대고 자세히 들여 보는 것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다.
오늘 예수님이 현 시대를 영적으로 공허했던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와 비교함으로써 회당에 있던 많은사람들이 분개하였다.
때때로 배척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보여주는 새로운 잣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귀에 즐거움을 주지 않기 때문에, 진지하게 현실을 대면하기를 싫어한다.

2)우리를 얽어매고 있고 다른 사람들을 잘못 대하는 왜곡된 삶의 관점들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복음실천을 하여야 한다.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첫발걸음은 우리 자신을 바로 잡는데서 출발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고통스럽게 관계가 깨져버린 장소가 되어버린 이 세상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관심과 사랑을 갖고 왔는가를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3)오늘 복음이 관심은 사회적 변화가 아닌 마음의 변화이다.
마음이 변화될 때, 자비로운 마음이 나타나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도 변화가 된다.
사람을 향해 관심을 표현하는 것은 복음증거에 있어서 아주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오늘 예수님이 회개, 용서, 죄 사함, 자유, 약속에 대한 선포의 메시지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비로움과 함께하시고 우리를 돌보고 게십니다.
희년에 대한 모습은 모든 적대인 것들과 부채로 부터의 총체적인 해방을 바라보게 하는 모습은 구원의 본질을 묘사한다.
회계장부에 적혀있는 모든 빚이 청산되었다.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 있으며, 그러나 이전의 삶 방식을 바라보는 삶은 이제 어두움과 소경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마음의 변화를 갖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