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에 관해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세례는 물로써 그리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사다.”
그렇다면, 세례는 죄를 지은 이들, 죄인들의 해방을 위한 성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무 죄도 흠도 없는 예수께서 일부러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서 이렇게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요?
루카복음 3장 3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서 행한 일은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베풀어준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는 뭔가요? 우리가 잘 알듯이 세례는 사람의 몸 특히 머리에 물을 붓는 행위를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살던 당시 이미 세례라는 방식은 존재해 있었습니다. 바로 사해 부근에 모여 살던 에세네파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행했던 정화 예식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선포하고 베푼 세례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바로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전단계로서 사람들이 회개를 하도록 이끄는 세례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 이외의 사람들이 행하던 세례는 단순히 자신을 위한 정화 의식으로서 “나 자신이 깨끗해 져야지” 하면서 스스로 몸을 씻는 행위였다면,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다른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세례를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다른 사람들의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진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진 행위나 예식이 구약 시대 전체를 통틀어서 이것이 역사적으로 처음 생긴 것입니다. 모세 오경, 특히 레위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제사나, 유다의 역대 왕들이 행하던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는 행위, 단식 등은 모두 자신의 정화를 위한 것이었지 타인의 회개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역사상 최초로 타인의 회개, 더 나아가 타인의 구원을 위한 예식을 만들어낸 최초의 인물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이 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세례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현재 교회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는 세례를 받는 사람이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사해주는 강력한 효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그 세례는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는 세례를 받는 사람이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사해주는 효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죄를 사해줄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가 베푼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 다시 말하면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전단계로 필요한 회개를 위한’ 세례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의 세례만으로는 아무런 죄도 실제로 사해지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사제로부터 받으시는 세례성사나 고해성사만큼의 효력도 없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타인에게 죄의 용서를 위해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를 주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가 큰 사건이었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엘리야나 다른 예언자들도 “회개해야한다. 하느님께 돌아와야한다” 하고 말은 했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세례와 같은 예식을 만들어서 직접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 주지는 못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세례자 요한이 출현해서 세례를 베풀던 사건은 그 당시에 대단히 큰 반향을 몰고 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는 것은 바로 회심, 회개의 체험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죄의 상태에서 돌아설 때에야 그 사람은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회심, 회개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 아우구스티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로욜라의 이냐시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같은 이들이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한 인간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어서 직접 세례라는 예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던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위대한 인물이 수많은 유다인들을 회개에로 미리 이끌어놓았기 때문에 뒤에 오신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기적들이 그들에게 제대로 흡수될 수 있었고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놀라운, 역사적인 세례자 요한의 그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친히 받으시고, 그 세례의 방식을 수용하신 후 그대로 세례성사로서 발전시켜 나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장면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창립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예수님의 이 세례 사건은 사실 예수님께서 겸손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일부러 스스로를 낮추셨기 때문에, 이 세례 사건은 가능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전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물려받으실 필요가 없이 새로운 성사를 제정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의 이 세례 양식까지도 받아들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세례 사건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겸손과 자기 비움이 공적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그 겸손함 때문에 하늘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울려 퍼집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 주님의 바로 이 겸손함이 주님을 따르고자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를 올바른 길로, 주님 마음에 꼭 드시는 길로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아멘!